[소개의 글]
백낙서(인제대학교 석좌교수)님이 저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신 황진이에 관한 글입니다. 백 교수님의 아호 신우(l又)의 신(l)은 아라비아 숫자의 1 같기도 하고 한글의 모음(ㅣ) 자로 보이기도 하는데 한자로는 하늘과 땅이 통한다는 뜻의 '신'이라고 합니다.
재치, 재미에 시조와 한시 해설도 일품이라... 허락을 받고 글 전체를 1부와 2부로 나누어 게시합니다.
두메솔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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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만고의 연인, 황진이 (1)
조선 중종 때의 시인이자 명기(名妓)인 황진이만큼 세월을 초월하여 사랑을 받는 여인도 없을 것이다. 평생 6수의 시조와 8수의 한시(漢詩)만을 남겼을 뿐 그녀의 삶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데도 황진이의 삶과 문학은 1936년 이태준의 <황진이> 이래, 정한숙, 박종화, 안수길, 유주현, 정비석, 최인호, 김남환, 최정주, 김탁환, 전경린 그리고 북한 작가 홍석중 등의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80년대 장미희의 드라마 <황진이>, 김탁환의 <나, 황진이>를 토대로 제작 방영(2006년 10.11 -12.28) 된 하지원의 <황진이>, 홍석중의 소설을 영화화(2007, 6월)한 송혜교의 <황진이>, 뮤지컬 <황진이> 등 대중 공연물과 천여 편이 넘는 연구논문 또한 황진이에 대한 마르지 않는 대중적 인기와 학문적 관심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최근(2005년)에는 작가이자 명상수련가인 문화영(여)은 깊은 명상을 통해 선계(仙界)의 황진이를 인터뷰하고(^^믿거나 말거나^^) <황진이, 선악과를 말하다>라는 책을 황진이와의 공저로 출판한 바도 있다. 이 글은 필자가 최근의 여러 <황진이>를 참조하여 조선 최고의 춤꾼이자 명창이며 시인인 황진이 면모를 단편적으로 소개함으로써 花郞敎授諸位의 고품격 한담(閑談)에 資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문화영에 의하면, 황진이가 교류하며 정을 나눈 당대의 수많은 명사들 가운데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뜻밖에도- 30년 면벽하다 파계했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라고 한다. 지족선사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파계”의 경지를 넘어선, 숭고한 사랑과 도력의 방중술로 남녀간의 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여성으로서의 황진이를 확인시켜준 선인이었다는 것이다.
선사와의 관계는 하늘과 우주의 원리에 의한 접합이었으므로 저의 모든 것이 먼지 한 톨 남김없이 불태워져서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 다. 진정한 성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았던 것은 바로 선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지족이 인간적인 사랑과 성적인 스승이었다면, 花潭(본명:徐敬㥁, 1489~1546)은 황진이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처음 황진이는 서화담도 유혹, 그녀의 화려한 남성편력에서 또 하나의 승리를 기록하고자 하였었다. 그러나 도인의 경지에 이른 화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황진이는] 화담처사 서경덕이 고상한 행실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의
정수를 이루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를 시험하고자 <대학>을 옆에 끼고
가서 절하며 말했다. ‘첩이 듣기로는 <예기>에 남자는 가죽 띠를 띠고 여자는
실띠를 띤다고 했습니다. 첩 또한 학문에 뜻을 두고 실띠를 두르고 왔습니다.’
선생은 웃으며 가르쳤다. 진이가 밤을 틈타 친근하게 굴며 마등(摩登)이
아난(阿難)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그러나 화담은
끝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한편, 碧初 홍명희의 손자로 “질박하고 풍성한 우리 말 구사”와 ”이제까지 북한문학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노골적인 성애묘사“를 했다는 평을 들으며 2002년 남한에서 수여하는 제19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북한 작가 홍석중(1941~ )은 당시 50대의 화담이 성기능을 상실해서 진이를 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진이는 돌아 눕는 척 하면서 경덕이가 누운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중략)
드디어 진이는 어둠속을 더듬어 사내의 손을 찾았다. 그 손을 잡아 자기의
가슴으로 끌어 당겼다. 도학군자노라고 자처하던 수많은 사내들의 도고한
혼이 이 풍만한 가슴위에서 종내 무릎을 꿇곤 했었다. 그런데 서경덕의 손은
그 탐스러운 가슴위에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인차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 . (중략) . . . (정말 병신이 아닐까?)
불쑥 이런 의심이 떠오르자 진이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굴려 경덕이가
누워 있는 윗목 쪽으로 좇아갔다. 제잡담 사내를 껴안으며 한손으로 ... 더듬었다.
<아!>
진이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와 같이 탄식이 새여 나왔다.
다시 한 번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래서 <얽은 껍질속의 유자요 질병안의 감홍루>
란 말이 있는 게다. 그것은 뛰어나게 잘나기도 했거니와 솟구치는 근력의
장엄함으로 말하면 색계상의 백전노장인 진이조차 깜짝 놀랄 만큼 그렇듯
뛰어나게 훌륭한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경덕은 그 태연한 표정과 침착한
행동거지 속에서 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정욕의 본능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서화담은 진이를 물리치지 않고 제자로 삼으며 더불어 담소하는 것을 즐겼다 한다. 허균(許筠, 1566~1645),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은 황진이가 “평생에 화담선생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선생의 거처에 가서 한껒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국문학계에서는 황진이를 “조선 500년 최고의 시조시인”이라고 하는데 주저하는 사람이 없다. 시인 고은도 “그녀 있어/ 조선 5백년 시조 4백수/ 다 어중이떠중이도 함께 정한(情恨) 찬란하였다/ 그녀 있어/ 조선시조 4백수 모두다 입 다물어 드렸다”고 읊은 바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이렇게 격렬한 운우의정(雲雨之情)을 절제된 에로티시즘으로 승화시키며 다음과 같이 단아한 시상으로 반달을 노래할 수 있는 여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詠半月(영반월) 반달을 노래함
誰剔崑山玉(수척곤산옥) 누가 곤륜산 옥을 깎아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 직녀 빗을 만들었던고
牽牛離別後(견우이별후) 견우와 이별한 후
愁擲碧空虛(수척벽공허) 슬픔겨워 벽공에 던졌다오.
기명(妓名) 명월(明月) 황진이는 송도 양반 황이(潢伊)와 그의 소실 현금(弦琴-거문고)이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는 확실한 것이 거의 없다. 그녀의 출생연도에 대해서도 1502년이라는 설(박영완 등 일부 학자들의 추정을 받아들인 김탁환)과 1511년경(문화영), 1520년대(이태준)설 등 각 주장의 편차는 최대 50년에 이른다. 또한 어머니 현금이, 거문고에 뛰어나서 황진이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대한 조기교육을 실시한 것에는 일치하나, 그녀의 성이 진(陳)이라고도 하고 김(金)이라고 하며 맹인이었다는 설, 아니라는 설, 아니었는데 후일 맹인이 되었다는 설 등 다양하다.
황진이의 삶에 대해서는,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서유영(徐有英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 등에도 설화적으로 때론 패설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황진이의 다음 세대인 한음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의 <송도기이(松都記異)>와 허균(許筠, 1566~1645)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이 원전(元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덕형은 1604년 어사가 되어 개성으로 가서 황진이의 가까운 친척 서리(書吏) 진복의 집에 묵으며 진복과 여든이 넘은 그의 부친으로부터 황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나이 여든이 넘었는데도 정신이 좋아서 진랑의 일을 말할 때마다 마치 눈으로 보는 듯 했다”고 적고 있음)
“가까운 친척” 진복이 현금이의 친가였다는 확실한 언급이 없는데 후세의 문사들이 친가로 생각해서 황진이 모친의 이름을 진현금으로 기술한 것이다. 확실한 것은 황진이의 외가는 아전 집안이었으며 아전 중에서도 특히 서리(書吏)는 기록과 문서정리를 담당하는 직으로 당시 양반이 아닌 자로서는 가장 문(文)에 능하며 항상 글을 접하며 생활하는 사람이 담당하였다. 문(文)에 능한 “가까운” 외숙에 의해 어린 진이가 타고난 문재를(文才) 개발하고 학문을 익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의 저자 허균은, 부친 허엽(許曄)이 <이기설(理氣說)> 등 서경덕이 구술하는 저서들을 받아 적을 정도로 화담이 가장 사랑한 제자였기에, 서경덕을 통해서 또는 당시 화담선방을 드나들던 황진이와도 직접 교류를 통해서 그녀를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현금이의 맹인설은 허균의 진술에서 유래되는데, 허균은 물론 그의 아버지 허엽도, 서화담도 황진이의 모친을 본 적이 없으니 “카드라 방송”의 과장이나 저자의 주관적 개입이 작용했을 것이다. 맹인설은, 마치 현대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안마사가 되는 것처럼 옛날 맹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분야가 악계(樂界) 뿐이었고 -- 논어(論語)에 등장하는 악사(樂士) 면(冕)도 맹인 -- 따라서 악사=맹인이라는, 그리고 심지어는 [서편제]에서와 같이 득음을 위해서는 생사람도 장님이 되어야 한다는, 옛 생각이 현금이의 빼어난 거문고 실력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반영된 듯하다.
양반집 서녀(庶女)라면 양반집 또는 부잣집 소실로 들어가는 것이 정상코스라 하겠는데, 황진이는 15세경 어머니가 죽자 보살핌을 받을 사람도 없는 집에 있기가 불편하여 자원해서 기생이 된다. 이렇게 기적(妓籍)에 자원입대한 진이는 기생훈련을 거쳐, 후일 해방된 여성으로 자유로이 사대부와 교류하며 사랑을 나누기까지 (황진이는 선전관 이사종李士宗과 6년간의 계약결혼을 통한 동거생활도 하고 정승의 아들 이생李生과 1년간의 금강산 무전여행을 같이 하기도 한다), 8~9년 정도 관기(官妓)로 복무했다.
비록 기생이었으나 황진이는 단아한 외모와 고상한 성품으로 범부들이 함부로 근접하기 어려운 면모가 있었다고 <송도기이(松都記異)>는 적고 있다.
황진이는 기적에 몸을 담았으나 성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관부(官府)의 주석(酒席)이라 할지라도 머리 빗고 세수할 뿐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또 방탕하게 굴기를 싫어해서, 시정의 천한 무리들은
천금을 준다해도 돌아보지 않았다. . . (개성유수) 송공 모친 수연석상에서의
일을 보면, 다른 기생들은 모두 능라비단으로 치장하고 머리에는 온갖 장식물을
꽂고 나왔는데, 황진이는 분도 바르지 않고 옅은 화장으로 참석하였으나
단연 미모가 으뜸이어서 광채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면 “낙마사건”으로 유명한 벽계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인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국어 교과서 등에 나와 있는 이 시조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벽계수와의 일화는 서유영(徐有英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황진이의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널리 퍼졌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한 번 만나기를 원했으나 풍류명사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친구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 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하리다. . . [벽계수가 그 말대로 하니] 과연 황진이가
쫓아왔다. 취적교에 이르러 황진이가 동자에게 물어 그가 벽계수임을 알고
“청산리 벽계수야 ~”를 부르니 벽계수가 그냥 갈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보다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일개 풍류랑이로다”하고 가버렸다.
스타일을 구긴 벽계수의 일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 벽계수는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요즘처럼 TOEIC 공부만 하고 학원에서 고시공부나 해서 출세한 친구라면, 또 EQ가 30도 안 되는 사람이라면, 황진이의 즉흥 시조가 아무리 멋있었다 하더라도 무슨 감흥이 있었겠나? 황진이의 시조를 듣고 말에서 떨어질 수 있는 벽계수는 경지에 이른 문학과 예술을 체득한 장부였을 것이다) 사실 황진이는 벽계수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없으면 살 수 없었을 것 같았”던 사람이라고 문화영과의 인터뷰에서 고백한다:
제가 참으로 좋아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인물이나 교양이나 인품이나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저를 참으로 아껴 주었고
저도 참으로 사랑했던 분이지요. 이루어질 수 없어 더욱 안타까움이 깊었던
분입니다 . . 없으면 살 수 없었을 것 같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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