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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황진이 시조와 한시 특집(2) /신우(l又)

NB2 2009. 12. 9. 15:22

제목: 만고의 연인, 황진이 (2)

 

 

벽계수였는지 다른 사람이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황진이가 사랑한 사람과 이별 후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시조 두 수를 아래에 소개한다.

 

어져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만은,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 나도 몰라 하노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에어 가는고.

 

 

황진이가 깊은 정을 주고 사모했던 또 한 사람은 판서(判書) 소세양(蘇世讓)이다. 소세양은 배움이 깊고 율시에 뛰어났으며 대제학·이조판서·형조판서·병조판서 등을 두루 거친 인물로서, 평소 “여색에 미혹되면 장부가 아니다”라고 했었다. 황진이를 만나게 될 때에도, “내가 황진이와 한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주위에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나 막상 30일을 같이 지나고 마지막 날 밤 누각의 송별연에서 황진이가 이별의 시를 읊자, 소세양은 탄식을 하며 “나는 사람이 아니다”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황진이가 읊은 한시는 아래와 같다.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    소세양판서를 보내며

 

月下梧桐盡 (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雪中野菊黃 (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어라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았고

人醉酒千觴 (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해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 (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 (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 (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멀리 떠난 님에 대한 정한이 아롱진 황진이의 한시(漢詩) 한수:

 

相思夢(상사몽)                          그리는 꿈

 

相思相見只憑夢(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뿐/ 님 찾아

弄訪歡時歡訪弄(농방환시환방농)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願使遙遙他夜夢(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언젠가 다음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일시동작노중봉)   같이 떠나 노중에서 서로 만나기를.

 

이 시는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라는, 김안서 역시, 김성태 작곡 <꿈길에서>란 가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황진이는 자신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로 꼽은 박연폭포를 자주 찾았다. 서경덕은 자신이 은거하던 화담선방에서 가끔 제자들을 데리고 인근(현재의 개성시 개풍군) 천마산 기슭에 있는 박연폭포를 찾아 풍류를 즐겼고 기녀(妓女) 황진이도 자신이 준비해간 술과 노래로 일행의 흥을 돋우곤 했다. 황진이는 또한 마음이 울적할 때 혼자서도 박연폭포를 찾아 스트레스를 확 풀어주는 웅장한 폭포수를 바라보며 자신을 추스르고 자신의 삶과 대자연을 관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박연폭포의 장관을 노래한 황진이의 漢詩:

 

朴淵瀑布(박연폭포)                     박연폭포

 

一派長川噴壑礱(일파장천분학롱)    긴 물줄기 바위에서 뿜어나와

龍湫百人水潨潨(용추백인수총총)    폭포수 백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네

飛泉倒瀉疑銀漢(비천도사의은한)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노폭횡수완백홍)    성난 폭포 가로질러 흰 무지개 완연하네

雹亂霆馳彌洞府(박난정치미동부)    어지러운 물방울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舂玉碎徹晴空(주용옥쇄철청공)    구슬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유인막도여산승)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수식천마관해동)    천마산이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박연 폭포의 장관, 황진이의 미색과 더불어 또 하나의 송도삼절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㥁, 1489~1546)은 조선 성리학의 양대 학파인 퇴계(退溪)의 영남학파와 율곡(栗谷)의 기호학파의 선하(先河)가 된 화담학파의 원조(元祖)이자 조선 유학(儒學)의 거봉이다. 실제 격암유록의 남사고(南師古, 1509-1571), 토종비결의 이지함(李之菡, 517-1578) 이율곡(李栗谷, 1536-1584) 등은 황진이와 동시대를 산 사람들로 서경덕을 직간접으로 사사(師事)한 사람들이다.

 

서경덕은 우주의 근원과 현상세계를 모두 하나의 기(“一氣”)로 보고, 인간이 나고 죽는 것 또한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현상일 뿐 맑고 허허로운 기의 본체는 시작도 끝도 없이 본래 하나라고 하였다. 그는 이(理)를 기(氣)의 위에 두기를 거부하고 이(理)는 기(氣)의 자기통제력, 즉 기(氣)의 한 속성으로 한정한다. 이것이 원이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귀신생사론(鬼神生死論) 등에서 개진된 서경덕 성리학의 단순화한 골자인데, 오늘날 북한에서는 서경덕을 조선조 최대의 ‘유물론자(唯物論者)’로서 특히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황진이 이야기 하다가 무슨 골 때리는 이기설(理氣說)이냐고?) 황진이의 스승이 단지 千字文이나 깨우치고 공맹(孔孟)정도나 가르치는 일개 서생이 아니라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사유(思惟)하는 大哲人이었다는 것과 황진이가 접한 학문의 수준이 그 정도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서화담은 황진이에게 (단전)호흡법도 가르쳐 주고(* 퇴계 이황의 호흡수행을 내용으로 한 활인심방(活人心方)이란 책이 있듯이, 우리 선조들은 학문과 동시에 호흡수련을 기본으로 하였다) 거문고를 좋아하여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無絃琴銘)>, <거문고에 새긴 글(琴銘)> 등 거문고에 대한 몇 편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총명한 제자를 사랑하는 것이 스승의 속성인 터에 거문고를 좋아하는 화담이고 보니 -- 비록 한때 발칙하게도 자신의 남성을 시험하려한 기녀이긴 하지만 -- 총명한 황진이를 거두어 제자로 삼고 가르치기를 즐겼던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황진이가 화담에게 말하기를, ‘송도엔 삼절이 있습니다’ 했다. 화담이 뭐냐고 물으니, 황진이는 ‘박연폭포와 스승님과 소녀이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선생은 웃었다”라고 허균은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기록하고 있다. 서화담과 귀엽게 노는 황진이 사이에 주고받았다는 시조를 각각 소개한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 (서화담)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황진이)

 

* 문헌에 따라서는 ‘온’이 아니라 ‘올’로 표기되어 떠난 님을 기다리는 노래로 해석되 기도 한다.

 

서화담은 명종이 즉위한 병오년(1546년) 7월 7일 58세로 자신의 서재에서 생을 마감한다. 2년가량 병석에 누워 있다가 이 날 병세가 조금 나아지자 시자(侍者)를 시켜 부축케 하여 연못에 나가 목욕을 한 후 돌아와 얼마 후 임종하였다고 한다. 임종 전 “선생님의 지금 생각이 어떠하십니까?”하니 “죽음과 삶의 이치를 내 안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마음은 편안하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허엽 등 화담의 제자들이 엮은 <화담집(花潭集)>)

 

평생 사모하던 스승님도 여윈 황진이는 자신의 말년 한적한 시간을 갖게 된다. “문무를 갖춘 만호후”를 상대한 자신의 일생을 담담히 회고한 한시(漢詩)와 옛사람을 그리워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한 시조를 감상해보자.

 

 

小栢舟(소백주)                                잣나무배

 

汎彼中流小柏舟(범피중류소백주)       저 강 복판에 떠 있는 잣나무배

幾年閑繫碧波頭(기년한계벽파두)       몇 해나 푸른 물가에 한가히 매였던고

後人若問誰先渡(후인약문수선도)       누가 먼저 건넜냐고 뒷사람이 묻는다면

文武兼全萬戶侯(문무겸전만호후)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황진이 자신도 얼마 후(그녀가 40쯤 된 1551년 추정) 임종을 맞게 된다. 황진이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나는 생전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니 죽은 후에는 산에다 묻지 말고 대로변에 묻어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於于野談).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유몽인(柳夢寅, 1559~1623)과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 황진이에 대한 글을 쓸 당시만해도 황진이의 무덤이 송도 대로변인 장단(長湍) 구정현(臼井峴) 남쪽 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개성시 판문구 석진리).

 

시에 능하고 님에도 능했던 황진이. 그녀는 이제까지 소개한 한시(漢詩) 이외에 <別金慶元(김경원과 헤어지며)>, <滿月臺懷古(만월대를 생각하며)>와 <松都(송도를 노래함)>이라는 시 세수를 더 남겼다. 또한 그녀는 선전관(宣傳官) 이사종(李士宗)과의 6년간 계약결혼, 재상 아들 이생(李生)과의 1년간 금강산 무전여행(원조교재?) 등 숫한 일화를 남기며 시대의 제약을 벗어나는 여성의 삶을 살았다. 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황진이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는 보다 깊은 연구와 많은 지면이 요구되는, 필자의 능력 한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花郞敎授諸位와의 잡담수준으로 시작한 “만고의 연인, 황진이”는 여기서 끝내려고 한다. 그러나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야야기를 하지 않고 어이 황진이를 끝낼 수 있겠는가!

 

그 자신 많은 글을 남긴 문필가이며 황진이의 명성을 익히 듣고 흠모했던 임제는 평안감사로 발령받고 가는 길인 송도에서 그녀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술과 예로 제(祭)를 지내고 다음의 시조를 읊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혀난다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어 그를 슬허하노라

 

그러나 “양반이 체통 없이 기생무덤에 참배했다”는 투서가 들어가고 정쟁에 급급한 조정에서는 그가 임지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통보를 내린다. 그 사건이 화병으로 도졌는지 임제는 얼마 안가 그 자신 임종을 맞게 되는데, “소인배들의 세상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끝.

출처 : 詩와 풍경이 있는 두메솔 쉼터
글쓴이 : 두메솔 이재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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